컬처 IN: 사진 지우면 추억 다 증발…젊은 층에서 늘고 있는 '디지털 저장 강박'

Almost one in four people in Australia face digital barriers (Rodion Kutsaiev on Unsplas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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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버리면 그와 관련된 추억과 경험도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저장 강박의 주요 원인으로, 최근 핸드폰 사진이나 디지털 파일을 과도하게 쌓아두는 젊은 층의 저장 강박이 늘고 있습니다.


Key Points
  • 뉴사우스웨일스대 연구팀, "저장 강박 성향 높을수록 외로움 크게 느껴"
  • 핸드폰 '사진' 못 지우는 '디지털 저장강박증' 젊은 층 사이에서 늘고 있다
  • 손쉽게 용량 늘릴 수 있는 현실적인 이유도 디지털 저장강박 원인 제공
  • 과감하게 데이터 버리는 연습 해야, 쓰레기 못 버리는 저장강박증 동반될 수도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은 과거 5층짜리 저택에 살면서 겨우 방 두 개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의미 없는 물건을 사 모으고 보관하는 '저장 강박증'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저장 강박증 성향이 있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저장 강박 성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더불어, 최근 젊은 층에서 늘고 있는 '디지털 저장강박'에 대해 알아봅니다. 컬처 IN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합니다.

나혜인 PD: 쓰지 않는 물건을 집안 가득 쌓아두는 것을 영어로 hoarding이라고 하고,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hoarders라고 부르죠. 의학 전문 용어로는 저장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데, 최근 뉴사우스웨일스대 연구팀이 저장 강박과 관련해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고요?

유화정 PD: 네. 지난해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팀이 성인 10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이 있는 이들 중 외로움을 느끼는 비율이 77.7%에 달했습니다. 반면 물건을 버리는 데 문제가 없는 이들 중에서는 36.8%에 불과했습니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립돼 외로움을 많이 느낄수록 사람 대신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습관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라고 확인했습니다.
a person with hoarding disorder is someone who doesn't throw anything away.
a person with hoarding disorder is someone who doesn't throw anything away. Source: Pixabay
나혜인 PD: 물건이 외로움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네요.

유화정 PD: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물건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해당 물건을 버리면 그에 얽힌 추억과 경험도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인데요. 심리학에서는 '나(자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가 있다고 보는데, 이는 가지고 있는 물건이 '나'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고 반문했는데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행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혜인 PD: 그런데 이제 잡동사니를 끼고 사는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는 물건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죠? 사소한 물건을 처분할 때도 자신의 일부가 사라지는 일처럼 여기고, 남에겐 쓰레기에 불과한 것에도 강한 집착을 보이니까요.

유화정 PD: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수집하는 저장 강박이 심해지면 집이 쓰레기장으로 변하는 등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에서 사용했던 지하철 탑승권이나 영수증 등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품처럼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심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적 자아, 즉 소유한 것이 나의 존재를 설명한다고 생각하기에 가지고 있는 하찮은 물건에도 나의 추억 또는 나의 일부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소중한 물건들을 잘 보관하기보다는 집구석 어딘가에 방치해 두기 일쑤라는 겁니다.

나혜인 PD: 예전 어른들은 냄비에 구멍 나면 땜질해서 쓰고 오래된 선풍기도 반짝반짝 닦아 쓰곤 하셨죠. 요즘에도 그런 성향을 가지면 짠돌이·짠순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완벽주의자인 경우가 많다면서요?

유화정 PD: 관련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버릴 때도 될 만큼 낡은 물건임에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 낭비하지 않겠다'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랜디 프로스트 미국 스미스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완벽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언제나 100%를 지향하기 때문에, 당장은 쓸모가 없더라도 100% 쓸모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물건을 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이를 거스르고 멀쩡한 물건을 버렸을 때는 낭비했다는 생각에 빠지고, 심지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언젠간 꼭 쓸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주 작은 쓰임새라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는 물건은 일단 보관하는데, 이렇게 아껴뒀던 물건 중에 한 번이라도 요긴한 사용처를 찾는 경험을 하면 "역시 내 말이 맞았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저장 행동을 강화하게 됩니다.

나혜인 PD: 그래서 세일 기간에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잔뜩 사들이는 경우도 많죠?

유화정 PD: 알뜰 주부들 중에는 배달용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깨끗하게 씻어 쌓아 두기도 합니다. 때로는 쌓아둔 것 물건이 필요할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런 강박적 사고는 보관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대가로 집안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가 많죠.
digital economy
digital hoarding
전문가들은 손해나 낭비를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박적 생각에 사로잡힐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보관에 따른 비용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대가로 집안 공간을 원래 용도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지저분함을 참아야 하는데, 안 쓰던 물건이 필요할지도 모를 '언젠가'를 위해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쾌적함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죠.

나혜인 PD: 오래된 신문, 잡지, 책 등 정보가 들어 있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죠. 이를 처분하면 그 안에 있는 정보를 영영 잃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데요. 그렇다고 자주 찾는 것도 아니면서요.

유화정 PD: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디지털 분야에서도 저장 강박 증세를 다루는 연구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년 치에 달하는 이메일을 삭제하지 않거나, 어느 폴더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른 채 외장 하드에 각종 파일을 통째로 저장하는 이들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데요.

이들 역시 데이터를 함부로 삭제했다가 관련 정보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정보를 없애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삽니다.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지우기 아까워 저장용량을 계속 늘리거나, USB에 따로 파일과 사진을 저장하기도 하죠.

디지털 저장강박증은 이렇게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진과 파일, SNS 대화내용 등의 데이터를 계속해서 저장해 두는 강박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나혜인 PD: '디지털 저장 강박증'은 공식적인 진단명인가요?

유화정 PD: 공식적인 진단명은 아니지만, 디지털 저장강박을 보이는 사람이 늘고 있어 최근 들어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질환입니다. 디지털 저장강박증은 아직 의학적인 진단 체계는 마련돼 있지 않아 디지털 저장강박증 설문지 등을 통해 증상을 의심할 수 있는데요. 데이터를 삭제할 때 느끼는 정서적인 어려움 및 스트레스, 불안 증상을 겪는 정도가 크다면 대체로 디지털 저장강박증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디지털 저장강박증이 있는 사람은 용량이 꽉 차 데이터를 지워야 하는 순간에도 '다음에 쓸 수 있을지 몰라, 이걸 버리면 큰일 날지 몰라' 등의 생각으로 데이터를 지우지 못하는데, 이 경우 디지털 저장강박증을 의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나혜인 PD: 그러면 단순히 지우기 귀찮아서 삭제하고 있지 않은 것은 디지털 저장강박증이 아닐 가능성이 높겠네요?

유화정 PD: 단순히 지우기 귀찮아서 삭제하지 않는 경우는 디지털 저장 강박증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디지털 저장 강박증은 데이터를 삭제할 때 느끼는 정서적인 어려움, 즉 불안감이나 스트레스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데이터를 잃어버리면 큰일 날 것 같고, 특히 사진을 지우면 그때 느꼈던 감정, 추억, 기억 등이 다 증발해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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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행위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먹고 데이터를 지울 수 있다면 강박 증상이라기보다는 습관이나 태만의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손쉽게 저장 용량을 늘릴 수 있는 현실적인 이유도 디지털 저장강박증의 발생 원인 제공이 되고 있습니다.

나혜인 PD: 디지털 저장강박증은 나와 관련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해 실제 집 안 가득 잡동사니와 쓰레기가 가득한 등의 증상을 보이는 저장강박증과도 연관성이 있나요?

유화정 PD: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저장강박증은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물건을 모으고, 모으지 못하면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질환인데요. 심한 경우 물건을 버리려 할 때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저장강박증은 노인층이 젊은 층보다 3배가량 많은 질환입니다.

반면 디지털저장강박증에 취약한 연령대는 디지털 기기를 주로 사용하는 젊은 층입니다. 또, 저장강박증에 비해 디지털 저장강박증을 겪는 환자는 그 증상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장강박증 환자는 특정 장소에 물건을 끊임없이 쌓아둬 집 구성원과 옆집 등 주변 사람에까지 피해를 주지만, 디지털 저장강박증 환자는 저장하는 데 있어 눈에 보이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비용이 크게 들지 않아 그 피해가 눈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혜인 PD: 저장 강박의 성향이 있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저장 강박 성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더불어 최근 젊은 층에서 늘고 있는 ‘디지털 저장강박’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컬처 IN, 유화정 프로듀서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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