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특별 전시… “호주 가족의 대를 잇는 한국을 향한 헌신”

Helen (third from left) and Catherine (second from left) Mackenzie at the opening of Ilsin Woman's Hospital in 1952

일신부인병원 창립 당시 매혜란(왼쪽에서 세 번째)과 매혜영(왼쪽에서 두 번째)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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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한국문화원이 오는 8일부터 시작하는 특별 전시는 1910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 29년간 나환자들을 돌본 제임스 매켄지(매견시) 선교사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한국 전쟁 중 부산에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해 20여년이 넘도록 봉사한 딸 헬렌(매혜란), 케서린(매혜영) 자매의 이야기를 소개해 한인 동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Highlights
  • 4월 8일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시작되는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전시
  • 1910년 선교사로 한국으로 파견돼 나환자 돌본 아버지 제임스 매켄지
  • 선교사로 한국 파견돼 나환자 아이들 돌보는 고아원 운영한 어머니 메리 켈리
  • 한국 전쟁 중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해 20년 이상 환자들을 치료한 딸 헬렌과 캐서린 매켄지
나혜인 피디: 오는 4월 8일부터 시드니 한국 문화원에서는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라는 특별 전시회가 진행됩니다. 한국의 성 씨 중 ‘매 씨’를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희귀 성씨인 매 씨 가운데 호주를 본관으로 하는 호주 매 씨는 바로 영어 성 매켄지에서 온 것인데요. 1910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제임스 매켄지 선교사가 이 성 씨의 시조가 됩니다. 멕켄지 선교사의 한국 이름이 바로 매견시(1865-1956) 입니다. 이번 전시는 한국 최초의 한센인 요양 시설에서 29년간 헌신한 제임스 매켄지 선교사와 고아원을 운영한 아내 메리 켈리, 매부인(1880-1964) 그리고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해 대를 이어 의료 봉사 활동을 해 온 두 딸 헬렌과 케서린 한국 명 매혜란(1913-2009), 매혜영(1915-2005) 자매가 남긴 자료를 보여줍니다. 이 가족들이 남긴 자료는 경기대 소성 박물관이 넘겨받아 디지털화해 세상에 남게 됐는데요. 경기대학교 소성 박물관 배대호 학예사 연결해 자세한 이야기 나눠봅니다.

나혜인 피디: 경기대 소성 박물관 배대호 학예사 님, 안녕하십니까?

배대호 학예사: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s curatorial team leader Mr Bae Daeho
경기대학교 소성박물관 배대호 학예팀장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나혜인 피디: 먼저 경기대 소성 박물관, 저희 호주 한인 동포 여러분 가운데는 생소하신 분들이 계실 텐데요. 소개를 좀 해 주시죠.

배대호 학예사: 우리 박물관은 경기도 수원에 있고요 아마 우리 호주에 계신 동포 여러분 중에서 경기대학교 출신이 계실 텐데 특별히 더 반갑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원래 이제 민화 농경 이런 것들을 가지고 소장품을 주로 가지고 있고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입니다. 저는 1998년도부터 이곳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고 현재는 학예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매 씨 가족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나혜인 피디: 와… 25년이 되셨네요.소성 박물관에서 매켄지 가족의 자료를 넘겨받게 되신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배대호 학예사: 사실 우리 박물관하고 호주 매 씨들 하고는 거의 접점이 없습니다. 원래 이분들이 활동하셨던 곳은 부산이고 저희는 수원에 있고 또 이제 기독교와 관련돼서 활동하신 분들인데 저희 학교는 이제 미션 스쿨이 아니고 또 병원이고 이래서 이제 저희들하고 큰 관련이 없는데… 이 매혜란과 매혜영의 제자 되시는 분이 김영옥 선생님이라고 지금 멜번에 거주하고 계세요. 그래서 이제 이분이 그 근처에 사시다가 매혜란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이 사진을 그분들이 세우신 일신기독병원으로 보내셨어요. 근데 저는 평소에 좀 김영옥 선생님하고 인연이 좀 있어서 제가 박물관에 있으니까 저한테 좀 가서 이 사진들을 좀 봐달라 그래서 제가 직접 가서 한번 보게 됐습니다. 근데 이제 막상 보니까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진들이 그 안에 있어서 제가 이제 2012년부터 디지털화를 하면서 연구를 시작을 했고요. 2016년도에 이제 첫 번째 전시를 개최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 아마 기억하실 텐데 제임스 최 대사가 한국에 부임을 하셔가지고, 특히 이제 우리 사진 전시를 보시고 아주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이제 한국에 있는 여러 기관들 경기도라든지 문화체육관광부 이런 곳에 좀 협조를 받아서 전시도 몇 차례 더 하고 또 특히 AKF 호한 재단에서도 지원을 좀 해 주셨고요. 또 이제 새로운 대사님 오셨는데 캐서린 레이퍼 대사님 오셔서 또 우리가 작년에 학술대회 할 때 직접 참석도 해 주시고 이렇게 해서 아마 저희가 이제 인연은 없이 시작했지만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지금까지 잘 온 것 같습니다.

1910년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아버지 제임스 매캔지

나혜인 피디: 네. 한국과 호주의 인연을 보여주는 가운데 이렇게 깊이 있는 자료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네. 이제본격적으로 매캔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보도록 하죠. 대충 저희가 앞에서 소개를 해 드렸는데, 이렇게 깊은 인연이 한국과 호주 사이에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감동이었습니다. 먼저 그 시작이 된 제임스 매켄지 즉, 매견시 선교사 어떻게 그 옛날에 한국에 오게 된 건가요?

배대호 학예사: 최초로 한국에 온 선교사는 헬리 데이비스라고 해서 1889년도에 오셨어요. 선교사로…

나혜인 피디: 호주에서 오신 선교사님이신가요?

배대호 학예사: 네. 그런데 이제 이분이 한국에 처음 오셨지만 부산에 도착하시자마자 금방 돌아가셨어요. 이제 사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그냥 단절될 줄 알았는데 이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곳에서 순교를 하셨으니까 한국을 해외 선교 지역으로 선정을 하신 거죠. 그리고 도리어 이 헬리 데이비스의 뜻을 따라서 부산과 경남 지역을 본인들의 주로 해외 선교 지역에 중점 지역으로 선정을 하시고 선교사들을 파견하시게 되셨어요. 그런데 이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한국에 오신 분은 사실은 부인인 메리 켈리입니다. 이분이 1905년도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멜번에서 출발을 해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서 한국으로 들어오셨는데 이 사이에 선원들이 왜 거기를 가려고 하느냐 거기는 식인종이 사는 나라다라고 막 놀릴 정도로 한국이 당시에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이제 메리 켈리가 와서는 주로 진주에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그다음에 이제 매견시는 두 번째로 이제 그러니까 5년 뒤에 1910년도에 부산으로 오셨습니다.
A wedding photo of James Mackenzie and his wife Mary Kelly
매견시와 매부인의 결혼 사진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나혜인 피디:  5년이나 있다가…그러면 따라오신 거네요?

배대호 학예사: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분은 오시자마자 아까 말씀하셨던 부산 나병원을 관리하는 일을 하셨어요.

나혜인 피디: 두 분이 그럼 결혼하고 난 후에 따로 오신 건가요 아니면 와서 만나서 결혼을 하신 건가요?

배대호 학예사: 원래 메리 켈리는 그냥 혼자 오셨고요. 매견시는 첫 번째 부인을 다른 선교지에서 잃었어요. 풍토병이 걸려서 그래서 한국에 오셔서 만나게 되셨습니다.

나혜인 피디: 한국에서 인연을 맺으신 거네요.

배대호 학예사: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1912년도에 결혼을 하셨어요. 한국에서…

제임스 매켄지, 29년간 부산나병원 운영…

나혜인 피디: 매켄지 선교사는 부산나병원을 1938년까지 관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부산나병원, 나환자들을 위한 곳일 텐데 어떤 병원이었나요?

배대호 학예사: 네 아마 나병 하면 보통 우리가 이제 요즘은 한센병이라고 순화를 해서 부르는데 아마 동포 여러분들 중에서도 경상도 분 계실 텐데 우리가 경상도 사람들 좀 비하하는 말로 저도 경상도니까 제가 표현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보리 문둥이라고 많이들 하는데요.

나혜인 피디: 보리 문둥이…

배대호 학예사:  네. 보리 문둥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 보리는 아마 경상도 지역에 보리가 많이 나서 그렇고 이 문둥이가 바로 나병 환자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로 경상도를 비롯한 전라도 남부 지역에 나 환자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최고 기록을 보면 4만 명까지 있었다고 해요. 근데 이 병의 특징이 나균이 몸에 들어가서 몸속에 있는 모든 신경이나 감각을 없애버리는 병이에요. 그러니까 내 몸에 상처가 나도 아픈 줄 모르는 거죠. 장기 속에 예를 들어서 암이 생겼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혜인 피디: 네.

배대호 학예사: 그래서 몸에 상처가 나면 보통의 경우는 빨리 치료를 하면 없어지겠지만 그게 자꾸 남아 있으니까 외형적으로 굉장히 많이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나환자들의 병을 우리가 천형이라고 불렀거든요. 하늘에서 내린 병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보기가 흉측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던 병이 바로 이 한센병 또는 나병입니다. 그러면 이제 가족들도 같이 있기를 거부하는 거죠. 그래서 둘 중에 하나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거주를 하면서 숨기거나 아니면 집에서 쫓아내 버리는 거죠.

나혜인 피디: 이게 전염이 되나요?

배대호 학예사: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족하고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전염이 되고요. 그러니까 이제 가족이 숨기는 사람들은 나중에 같이 이 병에 감염이 되고 그러니까 집 밖으로 쫓아내고 마을 밖으로 쫓아내서 이분들이 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예요.

나혜인 피디: 네.

배대호 학예사: 그런 나환자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이 부산 나병원은 1909년도에 한국 최초로 세워진 근대적 치료 기관입니다. 부산에 세워졌죠. 그런데 지금 이 병원은 사라졌어요. 발달이 되면서 이제 도시화가 되고 그런데 이제 이 병원 생긴 다음에 광주라든지 대구에도 각각 나병원이 생겨지고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소록도 나병원은 1916년도에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서 생긴 병원입니다. 그런데 매견시는 1912년도부터 이 나병원을 본격적으로 관리를 맡게 됐어요. 그전에는 그냥 직원으로 일하다가 이때부터 이제 관리자가 된 거죠. 첫해는 환자가 54명이었고 사망률이 25%나 됐습니다.

나혜인 피디:  높네요. 25%...
The Busan Leper Hospital
부산나병원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배대호 학예사: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1930년대로 오면서 본인이 굉장히 많이 환자들을 아끼고 치료를 많이 하면서 사망률이 2%까지 떨어졌어요.

나혜인 피디:  와우…

배대호 학예사: 그러니까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오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이 나병원의 규모가 우리 흔히 축구장 넓이로 비교를 하잖아요. 축구장 14개 크기…

나혜인 피디:  그 정도였나요. 부산에 있는 나병원이?

배대호 학예사: 그리고 병동이 40여 채 그리고 환자 수는 680명 정도 됐습니다.

나혜인 피디:  엄청난 규모네요.

배대호 학예사: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들이 그냥 치료를 하고 나가는 게 아니고 보통 치료를 하는 기간이 1년 이상 되기 때문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던 거죠.  근데 완치한 환자들은 또 거기에 살지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으로 나갔는데 문제는 외형은 많이 이게 처참했기 때문에 그분들이 또 마을을 이루고 사셨어요. 그 마을이 일곱 개입니다. 그리고 거기 사시던 분이 천5백여 명 정도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을 다 이 매견시 선교사가 관리를 했던…

나혜인 피디: 네. 그렇죠.

어머니 메리 켈리, 나환자 자녀들 위한 고아원 운영

배대호 학예사: 근데 지금 이제 우리는 매견시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까 말씀드렸던 1905년도에 왔던 메리 켈리 그러니까 이제 매견시와 결혼하면서 한국 이름으로 매부인이라고 불렸거든요.

나혜인 피디: 매부인…

배대호 학예사: 이분이 뭘 했냐 하면은 이 나병원에 들어온 환자들 중에서 감염되지 않은 자녀가 있거든요. 이 자녀를 나환자들이 버리고 들어왔어요. 감염이 되니까…

나혜인 피디: 그렇죠 아이들이 감염되게 할 수 없으니까…

배대호 학예사: 그 아이들을 거두어서 1918년도에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이라는 시설을 만들어서 그 아이들을 돌봤어요. 그래서 거기서 보통 자녀인 매혜란, 매혜영과 함께 키웠던 거죠. 그래서 그 아이들이 나중에 성장을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까지 함께 포함해서 부산 나병원을 이야기를 하고 이해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The House for Healthy Children,an orphanage for children left behind by leprosy
매부인과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 아이들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아버지의 길을 따라 걷는 두 딸 헬렌, 캐서린

나혜인 피디: 네. 이런 부모님의 유업이 딸들에게 이어진 건데, 영어 이름 헬렌, 케서린 매켄지 한국 명은 저희가 계속 말씀드렸지만 매혜란, 매혜영 이 두 분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나중에는 한국을 떠났다가  한국 전쟁 중에 다시 돌아왔다고요?

배대호 학예사: 네 그렇습니다. 이 두 분께서 매혜란, 매혜영은 이제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 당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다 평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1931년도에 매혜란이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을 하고요. 동생인 매혜영은 학교를 재학 중이었지만 언니가 호주에 돌아가서 계속 공부를 해야 되기 때문에 두 분이 같이 호주로 가서 공부를 하신 거죠. 근데 언니는 멜번 의과 대학을 가시고 동생은 왕립 멜번 간호학교에 각각 입학을 하셨어요.

나혜인 피디: 각각 그럼 의사와 간호사가 되신 건가요?

배대호 학예사: 그래서 이제 중간에 1944년도 45년도 이때 계속 한국을 가시려고 하셨는데 세계 2차 대전 때문에 입국이 안 되고 그다음에 또 한국전쟁 때문에 입국이 안 되고 그래서 계속해서 오시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51년도에 드디어 한국에서 들어와도 좋다고 허가를  합니다. 그래서 51년도 11월 7일에 멜번을 출발해서 52년도 2월 13일에 부산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두 자매가 한국 전쟁 중 부산에 설립한 일신 부인 병원

나혜인 피디: 그때 당시에 부모님은 그러면 이미 호주로 귀국하신 상태신가요?

배대호 학예사: 그렇습니다. 38년도에 한국을 두 분이 다 떠나셨기 때문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같이 사셨던 거죠. 사시다가 이 두 분은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신 거죠. 그런데 이 두 분이 사실은 이제 들어오시자마자 한국에서 아마 전쟁 중이니까 굉장히 어려웠을 테니까 52년도 2월 13일 날 한국에 들어왔다가 9월 17일 날 바로 이 일신 부인 병원을 개원을 합니다.

나혜인 피디: 전쟁 중인 곳에 다시 가셨다는 것 자체도 사실 참 얼마나 큰 신념이 있으셨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배대호 학예사: 네. 이분들이 이제 중간에 한국에서 입국을 못 하게 하니까 가장 가까운 중국으로 일단 가세요. 근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그 항공기를 타는데 화물기를 타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착륙을 했는데 두 분 다 얼어서 거의 죽음 문턱까지 갔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으로 꼭 돌아오시겠다는 그 신념이 굉장히 강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이분들이 한국에 오셔가지고 그 언니는 이제 20년간 병원장 하시고 은퇴를 하면서 조건 없이 한국인 병원장에게 모든 결정을 다 넘깁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잠깐 말씀드리면 최초에는 이 병원이 직원이 4명이었는데 네 20년이 지나고 나니까 직원이 231명이 돼 있었어요. 그리고 원장 재직 시절에 수술을 한 횟수가 2만 4702회, 하루에 3.4회. 초진 환자가 21만 772명 하루에 30명. 그러니까 이분이 한 수술은 사실은 분만이 아니고 일반적인 산부인과 수술을 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제 이거를 나중에 병원에서 들어보니까 지금 이제 현 원장님한테 들어보니까 이때 당시에는 가스를 가지고 환자를 마취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때 가스로 마취를 하면 그 수술방에 있었던 분들이 대부분 다 아주 약한 마취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33회 수술을 하셨던 셈입니다. 근데 더 놀라운 건 사실은 이 무료 환자인데 50년대는 50% 네 60년대에는 60% 70년대에는 29%의 환자한테 병원비를 받지 않으셨어요.
Helen Mackenzie was looking after a mother who delivered the 10,000th baby in Ilsin Women's Hospital.
일신부인병원에서 1만 번째 태어난 아이와 산모를 돌보는 매혜란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나혜인 피디: 정말 너무나 많은 빚을 저희가 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배대호 학예사: 그리고 이번 전시대 가서 보시면 그중에 사진이 나와 있을 텐데 쌍둥이들이 나와 있는 사진이 꽤 많아요. 네 그 사진이 뭐냐 하면 잘 아시겠지만 한국은 남성 여성 차별이 좀 많이 존재했었잖아요. 그래서 쌍둥이를 놓으면 딸 아이한테 먹을 걸 안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매 원장님께서 남녀 쌍둥이는 반드시 같이 데리고 와야 치료를 해주고 먹을 걸 나누어 줬는데 이게 쌍둥이 파티라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근데 이제 동생분도 사실 동생분이 이제 간호사이면서도 동시에 조산사였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간호를 하시면서 받아낸 아이가 7만 2302명이…

나혜인 피디: 와…그때 인구를 생각한다면 진짜 대단한 숫자인데요.

배대호 학예사: 그래서 하루 평균 7명의 아이를 받아내셨고요 그 다음에 더 또 재미있는 것은 아까 제가 김영옥 선생님이라고 멜버에 계시는 분이 바로 여기서 교육을 받으신 분인데 전체 1036명의 조산사를 배출을 해서 전국에 보내셨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보통 산파가 아기를 받았는데 조산 교육을 시켜서 보냈던 거죠. 그 정도로 이 두 분이 활동하셨던 것들이 굉장하셨다. 저희가 통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혜인 피디: 믿기 어려운 업적이십니다.매 자매 두 분은 특히 한국에서 태어나서 또 앞서 말씀하셨지만 나환자 자녀들과 같이 자라셨다고 하셨기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배대호 학예사: 부산 사투리를 굉장히 구수하게 잘 쓰시더라고요. 저도 이제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하고 영상을 통해서 확인을 해 보니까 굉장히 부산 사투리 잘 사용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매혜영과 조산사 교육생들
매혜영과 조산사 교육생들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자매가 남긴 과거를 담은 9000여 장의 사진

나혜인 피디: 이분들이 남긴 자료들 가운데 역사적인 사료로 특히 의미가 있는 자료가 있을까요?

배대호 학예사: 저는 일단 이 사진 자체 거의 9천 장 정도에 이르고요 네 전 세계를 다 찍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주도 있고 당연히 유럽 네 여행 가셔서 다 찍으셨고 중국, 일본, 홍콩 우리나라는 29개 지역을 촬영을 하셨더라고요

나혜인 피디: 그럼 거의 뭐 5, 60년대 사진인가요? 50, 60년대 70년대?

배대호 학예사: 일제강점기 아버지 때에서부터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대로 따지면 거의 100년 정도를 움직이는 아버지가 아직 어렸을 때부터 사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남아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아버지가 운영했던 부산 나병원과 관련돼 있는 기념비석을 저희가 이걸 조사를 하다가 발견을 했는데 이 비석을 제가 2020년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도록 신청을 했어요. 그래서 작년에 781호로 지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한국과 호주 사이에 최초의 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것들 이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이제 무형의 자산 중에 저희 우리가 이제 이 이야기가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 라고 되어 있는데 종결부 쪽에 가시면 끝나지 않은 소풍이라고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뭘 말하냐 하면 아까 제가 설명드릴 때 매부인이 나 환자들의 자녀들을 키웠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 사람들이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훨씬 우수한 교육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이제 그런 줄 알았는데 1946년도에 찍은 사진이 한 장이 발견이 됐는데 이 사진에 보면 그 어떤 벽돌집 앞에 헤롤드 레인이라고 하는 분과 조지 앤더슨이라는 선교사가 앉아 있고 뒤쪽으로 굉장히 장년의 남성들이 아이들과 그의 부인들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을 한 장 발견했어요.

나혜인 피디: 네.
A photo of many well-dressed Korean people standing up in front of an orphanage building run by Mary Kelly
끝나지 않은 소풍의 단서가 된 사진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배대호 학예사: 근데 지금 아까 우리 사회자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1946년도는 호주 매씨 가족들이 한국에 아무도 안 살 때예요. 38년도에 떠났고 52년도에 돌아왔으니까… 도대체 이 사진이 뭐지 하다가 저희가 기가 막힌 걸 찾아낸 것이 바로 그들이 서 있는 그 집이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집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면 그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나혜인 피디: 거기서 자란 아이들이?

배대호 학예사: 맞습니다. 그들이 성장해서 사회에서 굉장히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52년도에 귀국하신 분들이 병원을 금방 만들고 여성 두 분이 56년도에 지금 또 부산 일신기독병원이 사용하는 건물을 완성하셨어요. 4층짜리를…

나혜인 피디: 저도 사실 거기서 태어났어요.

배대호 학예사: 그러세요?

나혜인 피디: 이런 인연이 또 있더라고요.

배대호 학예사: 그 건물을 짓도록 도와준 것이 바로 이 아이들입니다. 아이 중에 한 명이 건축사가 돼서 그래요 건물과 그 사진들 곳곳에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 사람들을 한 명씩 다 만들어낸 한 장씩 다 만든 다음에 저희가 갖고 있는 사진에서 다 찾아냈어요. 그랬더니 바로 이 매 자매 주위에서 그들이 다 남아 있더라고요. 사진 속에 그러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나환자들을 돌보고 그 나환자들의 자녀들이 성장해서 한국에 돌아온 매 자매를 도왔던 거죠. 그리고 다시 또 그 매 자매는 50% 60%에 이르는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줬죠. 그래서 저희가 이 소풍이 결코 끝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나지 않은 소풍이라는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혜인 피디: 그렇네요. 정말 매씨 가족이 뿌린 씨앗들이 한국에서 정말 크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전시회, 저희가 이제 시드니에서 전시가 진행이 될 텐데요. 어떤 자료들 직접 볼 수 있을까요?

배대호 학예사: 일단은 이제 가족과 관련돼 있는 연대기를 저희가 준비를 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매견시와 매부인의 활동이 담긴 사진들 네 그리고 매혜란과 매혜영 자매가 병원에서 했었던 활동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끝나지 않은 소품과 관련된 사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분들이 이제 한국에 남아 있던 여러 모습들을 찍어놓으셨는데 한국 전쟁 그리고 등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높은 곳에서 세상 보기 그다음에 이제 우리 문화재를 사진을 많이 남겨 놓으셨기 때문에 아름다운 문화재 그다음에 소소한 일상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면들을 사진을 찍어놓으셨거든요.  저희가 이번 특별히 이 높은 곳에서 세상 보기와 관련해서는 현재의 한국의 모습을 똑같은 곳에 가서 드론을 촬영을 해서 내 보냈습니다. 그래서 한번 함께 보시면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혜인 피디: 그리고 사실 아주 오래전에 한국을 떠나서 호주에 오신 저희 동포 여러분들 같은 경우는 과거의 모습을 좀 한 번 더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James, Helen and Catherine Mackenzie and Mary Kelly
매켄지 가족 사진 Source: Kyonggi University So-sung Museum

매켄지 가족의 영화같은 삶…

나혜인 피디: 우리 배대호학예사님 께서 이 많은 자료를 처음 보시고 디지털화하시고 또 전시를 기획하셨는데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드셨을 것 같아요. 어떠셨나요?

배대호 학예사: 저는 이 전시를 2016년도 전시 준비할 때를 잊을 수가 없는데요. 사실 우리가 전시를 준비할 때도 제가 이 전시에 녹아들어야만이 전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어떤 작가와 같은 그런 심정으로 준비를 했는데 사실 좀 죄송스럽게도 제가 보통의 사람이다 보니까 이분들의 삶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냥 아버지가 이렇게 하고 갔다고 하면 이해되고 어머니가 이렇게 하고 갔다고 하면 이해되고 딸들이 이렇게 하고 갔다면 이해가 되는데 2대에 걸쳐서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혜인 피디: 뭔가 저도 얘기를 들을 때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배대호 학예사: 근데 이제 1949년도 제가 멜버른에서 나온 썬(Sun)지를 봤는데 거기에 무슨 기사가 있냐면 “할리우드는 제임스 노블 매킨지의 삶에 대한 영화를 감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상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 기사는 그 매견시에 대한 이야기지만 매킨지 가족 전체를 표현하는 데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래서 제가 이때부터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이건 영화야...

나혜인 피디: 영화 같은 삶…

배대호 학예사: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전시가 일사천리로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분들의 삶을 제가 아주 외람되게 소풍이라고 표현했고 또 이분들에게 호주 매 씨라고 하는 한국식의 본을 붙여 드렸지만 하나의 영화와 같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영화와 같다. 이런 생각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혜인 피디: 정말 겸허해지는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영화가 나왔나요?

배대호 학예사: 하하하 한번 현장에서 보시면 좋겠어요.

나혜인 피디: 네. 끝으로 전시 기다리시는 저희 호주 동포 분들께 당부 말씀 있으시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배대호 학예사: 이번에 이제 우리 박물관과 함께 주 시드니 한국 문화원이 전시를 함께 하게 됐습니다. 아마 이 문화원에 계신 분들도 또 저희가 첫 전시할 때부터 오셔서 이 전시를 꼭 시드니에서 하시겠다고 2016년도부터 계속 저희하고 연락을 취해하셨는데 또 사실 코로나 기간이라 저희가 직접 가지를 못해서 너무 안타까운데요. 아무튼 모쪼록 좀 시드니라고 하는 곳에 한정돼서 열리긴 하지만 많이들 와서 봐주시고 또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고요. 저는 또 다음 좋은 기회가 있으면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혜인 피디: 네. 경기대 소성 박물관 배대호 학예사 님 함께 했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배대호 학예사:  감사합니다.(끝)

매 씨 가족의 한국소풍기 (Australian Mackenzie family’s Journey in Korea)

  • 일시: 4월 8일 - 7월 8일
  • 장소: 시드니 한국 문화원(255 Elizabeth St, Sydney, NSW,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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